※당연히 스포일러 있습니다.※
극장을 나오면서 '큰일 났구나'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도무지 영화가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아예 뭘 본 건지조차 헛갈릴 정도로 영화는 예상의 범주 내에 속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상기는 커녕 일기를 쓰는 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어떤 예상을 하든 틀릴 것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에 예상이라는 것을 아예 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럼에도 이 영화는 무의식 중에 상상하던 모습조차도 닮지 않은 채 훨씬 더 먼 곳으로 가 있었다.
애시당초 한 번 관람으로 영화를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결국 빠른 시간 내에 한 번 더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두 번째 감상을 마치면서 나는 가까스로 영화를 정리하기 위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다크나이트>는 이러이러한 영화'라고 답을 내리는 글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추후 DVD로 수 차례 재감상이 이루어진 후에나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내 머리는 혼란스럽고, 영화를 재조립하는 데에 버거움을 느끼기에 두 번의 감상을 통해 얻은 궁금증들을 던져놓는 자리로서 이 글을 쓴다. 그렇기에 이 글은 매우 두서가 없고 요점 역시 없으며, 생각 가는 대로 쓰인 뒤죽박죽의 글이 될 것이다. 인용한 대사들 역시 대강의 의미만을 기억해내 재구성했을 뿐, 정확하지 않다. 최대한 영화의 서사 순서대로 글을 써내려갔음을 밝힌다.
그런 고로 긴 글을 읽기 싫어하고 인터넷 시대의 난독증에 걸려 세 줄 요약이 첨부되어 있지 않으면 좀이 쑤신 분들이여, 다른 블로그를 찾아주시라.
질문들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은 조금 뒤로 미루어놓은 채….
크리스토퍼 놀란은 시간의 전후를 뒤집어 이야기를 해체하고 조립시키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결정적 계기인 <메멘토>는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면서 이미 일어난 사건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통해 충격을 주었고,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브루스 웨인의 과거와 현재를 계속해서 교차시켜 진행시키면서 그가 어떻게 과거를 극복해나가는가를 보여주었다.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 사이에 자리한 <프레스티지>에서는 기록된 사건 속 과거를 보여주면서 다시 그 속에서 과거를 보여주는 복잡한 시간 구조를 통해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불러들였다.
<다크나이트>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식의 편집과 구성은 최대한 절제되어있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배트맨 비긴즈>로 충분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다크나이트>는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 충실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영화는 조커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슈퍼히어로 계열의 영화에서 악당이 먼저 등장하는 구성 자체는 낯설지 않은 방식이지만 <다크나이트>의 그것은 조금 다르다. <다크나이트>는 배트맨 대 조커라는 대결구도를 세우고는 있지만 그 자체가 영화의 핵심 사건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축으로 자리하는 하비 덴트가 있기 때문이다. 번거롭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잠시 세 명의 등장인물을 등장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조커가 은행을 털고 나면, 경찰청 마천루에서 배트맨을 기다리는 고든이 등장한다. 라미레즈가 '왜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하고 묻자 고든은 '그가 일 때문에 바쁜 것이길 바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영화는 마약 거래를 하고 있는 스캐어크로(허수아비) 일당과 배트맨을 흉내내는 자경단들의 싸움 속에서 텀블러를 타고 등장하는 배트맨을 보여준다. 배트맨은 스캐어크로 일당과 가짜 배트맨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면, 알프레드가 임시로 세운 웨인 기업 폐공장 지하의 기지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브루스 웨인을 발견하고, 다시 조커의 범죄가 일어났던 은행에서 고든은 배트맨을 만나고 하비 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고든과 하비 덴트가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면 조커 - 배트맨 - 브루스 웨인 - 하비 덴트의 순서로 영화의 주인공들이 차례로 등장한다(나는 굳이'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구분했다). <배트맨 비긴즈>가 온전히 브루스 웨인/배트맨에 대해 파고드는 이야기였다면, 세 명의 모습이 하나로 합해진 위의 포스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크나이트>는 세 명의 인물을 '동등하게' 다루면서 세 개의 축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맞물리도록 구성하고 있다.
배트맨이 스캐어크로 일당과 그에 맞서던 가짜 배트맨들을 일망타진하고 퇴장할 때, 가짜 배트맨 중 한 명이 배트맨에게 불만을 표시한다. "왜 너만 싸울 자격이 있는 건데?" 그에 대해 배트맨은 다소 엉뚱한 대답으로 "나는 하키 보호대는 안 해"하는 말로 응수하고 퇴장한다. 별 생각 없이 이 장면을 지나친다면 그저 진지한 와중의 한 마디 농담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제법 위험한 해석을 낳을 여지를 남긴다. 무엇이 브루스 웨인만을 '배트맨'으로 활약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있는가? 물론 브루스 웨인의 마음 속에는 '나처럼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방황해보지 않은 이들은 배트맨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나, 이 말을 외양 그대로 해석하면 굉장히 계급주의 적 발언이 된다. 일반인은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텀블러와 007을 방불케 하는 첨단 장비, 그리고 특수 제작된 슈트. 만약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다면 배트맨이 되지 말라'는 뜻으로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브루스 웨인은 부모를 잃었지만 덕분에 엄청난 재산과 기업을 물려받기도 했다. 브루스 개인의 부와 배트맨으로서의 활약은 부모의 죽음이라는 사건 없이는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가짜 배트맨들을 고용하고 좀 쉬지 그러냐'는 알프레드의 농담에 브루스는 '범죄에 맞서라는 내 메시지가 잘못 전달됐다'며 자경단들이 그의 뜻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해라고? 대체 무엇을 오해하고 있다는 뜻인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서 고담의 시민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배트맨 비긴즈>로 돌아가보자. 브루스는 부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실패하고 그 실패의 원인인 팔코니에게 복수의 화살을 돌렸으며, 범죄자들에게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돌려주기 위해 박쥐라는 상징을 설정하고 배트맨이라는 가면을 만들어냈다. 브루스는 '배트맨'으로서의 첫 활약으로 팔코니를 잡아 고든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배트맨의 임무는 끝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배트맨이 되기 위해 가르침을 받았던 라스 알 굴(듀커드)과 일당은 웨인 가의 성을 무너뜨리고, 스캐어크로의 환각제를 통해 고담 시 전체를 혼돈으로 몰아간다. 혼란 속에서 배트맨은 죽은 아버지가 고담을 위해 만든 전철 속에서 제 2의 아버지 격인 듀커드와 최종 대결을 벌인다. 결국 듀커드는 무너지는 전철과 함께 추락하고, 브루스는 '두려워하지 말아라'하고 자신에게 말했던 아버지의 말과 인자했던 표정을 되새긴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부모의 죽음의 간접적 원인인 박쥐 공포증을 브루스가 갖게 된 이유는 오래된 우물 속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며, 그전에 그 우물에 떨어지게 된 원인은 어린 브루스가 어린 레이첼의 손에서 오래된 화살 촉을 빼앗아 달아났을 때-즉, 그의 최초의 범죄가 저질러졌을 때, 박쥐는 그에게 '심판'처럼 나타났다.
레이첼의 손에서 화살촉을 빼앗는 순간, 박쥐 공포증은 그에게 심판처럼 나타나 모든 것을 뒤바꿔버렸다.
범죄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줌으로써 범죄를 없애는 것. 즉,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 자체가 배트맨의 심판과 연결된다는 공포를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며 이는 반대로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두려울 것도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배트맨의 존재 자체는 엄연히 위법이다. 그래서 브루스는 자신의 흉내를 내며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또 다른 무법자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범죄자의 수 만큼 배트맨이 늘어난다면, 고담은 그야말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무법 천지가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 역시 무법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브루스는 '유일자'가 되길 원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브루스/배트맨 그 자신이 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레이첼과 하비가 데이트 중인 식당에서 합석한 브루스는 그들과 배트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비는 배트맨을 두고 민주주의보다 민중의 수호자를 더 중시했던 로마의 예를 든다. 그러자 레이첼은 로마의 그 수호자가 바로 '시저'였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가 그 권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이 대화를 통해 나는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배트맨'은 권력인가? 배트맨이 정의의 사도인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가 무법자(Outlaw)라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전작인 <배트맨 비긴즈>에서 스캐어크로의 환각제에 중독된 레이첼을 구해내기 위해 배트맨이 텀블러를 타고 도시를 종횡무진했을 때, 알프레드가 '능력을 과시하면 안 된다'고 꾸짖자 브루스는 '레이첼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그러자 알프레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말했다.
배트맨으로서 범죄에 맞서는 것이 그가 스스로에게 지운 의무라면, 그는 그것을 권력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알프레드는 바로 그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비단 배트맨 뿐만이 아닌 모든 영웅들의 딜레마가 그러하듯이, 법의 규율 내에서 슈퍼히어로로 활약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얘기인가?
배트맨, 구원자인가 위협인가?
브루스는 하비에게 고담 시의 '백기사'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배트맨이 어둠 속에서 범죄를 제압하는 '흑기사'라면, 하비 덴트는 법의 질서 속에서 범죄를 심판하는, 말하자면 동전의 앞과 뒤와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배트맨이 무법으로서 범죄자들과 맞서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면, 하비 덴트는 법의 집행자로서 같은 집행자들의 비리를 밝혀내고 심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재판장에서 범죄자들과 대면할 때와는 달리 브루스가 주최한 후원 파티의 유명인사들 사이에서는 어쩔 줄 모르는 하비의 모습. 그래서 하비 덴트는 투 페이스라는, 말 그대로 이중성을 뜻하는 별명 또한 갖고 있다.
하비 덴트는 배트맨의 활동에 대해 드러내놓고 지지하진 않지만 부패한 경찰들보다는 오히려 그를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배트맨의 활약은 법이라는 규율 앞에서 선행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부패로 가득한 고담 시에서는 차선책인 그가 곧 최선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비는 고든을 통해 배트맨을 만나고 필요에 의해 서로 협력하기로 한다. 배트맨에게 있어서도 하비의 존재는 긍정적인 힘이 된다. 범죄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범죄의 규모가 커질수록, 일개 경찰에 불과한 고든 외에 배트맨에게는 자신 만큼 양지에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비 덴트와 배트맨은 동전의 양면처럼 백기사와 흑기사가 되어 범죄에 맞서려 한다. 그 사이에 매개체처럼 고든이 있다.
조커는 백주대낮에 어느 은행에서 거액의 돈을 털어간다. 그 돈은 고담 시의 고위급 범죄자들의 것이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찰에서는 배트맨이 제공한 특수지폐를 통해 그들의 자금을 추적해 씨를 말리려 한다. 궁지에 몰린 범죄자들의 비밀 회의에 유유히 조커가 나타난다. 조커는 배트맨을 제거해준다는 조건으로 그들 자금의 절반을 요구한다. 그들의 자금을 통합해 관리해주는 홍콩의 기업가 라우마저 미션 임파서블을 방불케하는 배트맨의 활약으로 잡히고, 라우의 배신으로 자신들마저 무더기로 잡혀들어가자 울며 겨자 먹기로 조커를 고용하게 된다.
조커는 배트맨을 잡기 위해 배트맨으로 꾸민 자경단을 납치해 살해하는 동영상을 유포하고 '진짜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나타나지 않으면 계속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가 밤과 낮의 사도로서 고담 시의 강령과 규칙을 만드려고 하는 존재라면, 조커는 '혼돈' 그 자체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공포를 이용해서 선악의 구분을 지우고, 선한 사람이라도 아주 약간의 동기만 주어지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배트맨이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그의 협박은 배트맨의 원칙을 부수기 위함이다. 그것도 그냥 부수는 것이 아니라 배트맨의 원칙 사이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부수겠다는 것이다.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과 '범죄자라 할지라도 인명 살상과 피해를 용납하지 않는 것'. 조커의 협박은 이 두 원칙을 갖고 브루스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가 타깃으로 삼은 건 배트맨 뿐만이 아니다. 하비 덴트를 후원하기 위한 브루스의 파티에 나타난 그는 하비가 보이지 않자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을 협박하고, 레이첼마저 위협한다. 게다가 드러내놓고 자신의 타깃이 하비 덴트임을 선언하고 그가 물러날 것을 종용하는가 하면 경찰청장과 판사를 암살하면서 도시를 점점 혼돈으로 몰아넣는다.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유령 같은 존재다. 그에게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떠한 기록도 없으며, 그가 입고 있는 옷조차 상표가 붙어있지 않은 출처 불명의 것들이다. 배트맨 역시 신출귀몰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영화 속에서 조커의 동선은 도저히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다. 오프닝 5분 동안 벌어진 은행강도 시퀀스를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이 고용한 범죄자들조차 제멋대로 조종하며 하나씩 제거하고, 일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마치 시계태엽이 돌아가듯 치밀한 모습을 보여주고 귀신 같이 사라진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두 번째 감상 이후 영화를 되새김하면 할수록 영화 속에서 조커의 활약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거의 신(神)과도 같은 경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비 덴트가 창문에 기대고 있을 때 정확하게 그 시간에 그 위치에 가짜 배트맨의 시체를 매달아 떨어뜨린다. 그런데 누가 어떤 방법으로 빌딩의 옥상까지 올라가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고용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다. 누군가가 하비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경찰청장과 판사를 암살하는 부분 역시 과연 그것이 계획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되묻게 된다. 청장의 잔에 독을 묻히는 것은 그렇다쳐도, 판사를 대피시키면서 경찰이 그녀를 직접 호송하지 않고 그녀 자신의 차를 운전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 자체에 어딘가 논리적 오류가 있다. 판사에게 대피하라고 하면서 조커의 소포를 전달한 경관은 이미 조커 혹은 고담 시 범죄조직에 매수됐다는 가정이 가장 그럴듯 하지만, 그녀가 조커의 메시지 'up'을 읽는 순간 그녀가 탄 차량이 폭파된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기 위한 허용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섬뜩한 구석이 있다.
조커는 영화 속에서 유령처럼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가 벌이는 범죄들은 단순히 계획적인 것을 떠나 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계산이 불가능한, 신의 영역까지 넘볼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이상한' 관계를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했던 안톤 쉬거의 캐릭터 역시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주인공을 괴롭히고 아무런 감정도 없이 살인을 자행하는 조커와 연관짓기가 크게 어렵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크나이트>의 이 이상한 삼각관계가 설명이 되진 않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모스는 쫓기는 자며, 쉬거는 쫓는 자, 그리고 벨은 그 추격의 선을 뒤따라가는 자였다(물론 이건 아주 단순하게 바라본 설명이다). 그러나 <다크나이트>의 세 명은 그리 쉽게 단순화시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한 관계다.
아마도 이는 브루스 웨인/배트맨의 이중성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닐까. 브루스는 하비 덴트를 브루스 웨인이라는 기업가와 배트맨이라는 두 정체성 모두를 이용해 그와 접촉하고 그를 돕는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다시피 거기에는 개인의 욕망과 영웅의 의무라는 이면성이 자리한다. 투 페이스가 하비 덴트의 별명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진짜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것은 고담 시에서 브루스/배트맨 밖에 없다(심지어 범죄자들도 가면을 쓰진 않는다). 어쩌면 배트맨이 가짜 배트맨 자경단의 존재를 원치 않았던 것은(그리고 그 와중에 스캐어크로 역시 퇴치된 것은) 자기 외에 누구도 가면을 쓰지 않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조커는 배트맨과 하비 덴트 두 사람 모두를 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목적은 결국 배트맨이다. 조커가 하비 덴트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긴 하지만 사실 그 목적은 배트맨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가 자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비는 자신이 배트맨이라는 가짜 자백을 하면서 배트맨이 조커를 잡도록 스스로 미끼가 되고, 조커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자백을 마음 먹었던 브루스는 하비의 가짜 자백의 순간 차마 나서지 못한다. 그 이유엔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지만 결국 그 중심엔 레이첼이 있다.
브루스는 배트맨으로 살아가면서 레이첼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브루스가 자백하고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면 그 역시 레이첼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 배트맨을 포기하면서도 레이첼과 함께 할 수 있는 법은 고담 시의 치안이 배트맨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좋아지는 수밖에 없다. 부패한 경찰들과 범죄자들의 연계 역시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브루스 웨인에게, 고담 시에는 하비 덴트라는 '백기사'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위에서 언급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범죄자들 사이에서 조커가 등장하고, 그것이 변수가 되어 브루스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 자신이 자수하는 대신 하비와 협력해서 조커를 잡게 된다면 배트맨으로서의 권리와 권력을 포기하고 레이첼과 함께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그의 이상이 실현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지는 것이다.
레이첼은 배트맨의 정체를 아는 동시에 브루스의 '정상적'이었던 과거에 함께 했던 유일한 여성이다. 그런 그녀를 브루스가 정상적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단서로서 삼는 것은 당연하다.
조커는 배트맨에게 두 사람 중 하나만을 구할 수 있는 선택을 준다. 그 어느 쪽도 최선의 선택일 수 없지만 배트맨은 레이첼을 선택한다. 하비 덴트를 구한다면 그는 언젠가 배트맨의 자리를 포기할 수 있겠지만 레이첼과 함께 하기 위해 배트맨을 포기하려던 브루스에게 레이첼이 없다면 하비 덴트의 구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조커는 선택권을 주되 진실을 '약간' 곡해한다. 그래서 배트맨은 레이첼아 아닌, 하비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나는 여기서 조커의 사악함에 치를 떨기보다는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배트맨의 단순함에 더 허망함을 느꼈다(물론 상황이 무척 급박하기는 했다). 어찌되었든 배트맨은 '할 수 없이' 하비를 구하게 되고, 레이첼은 '아주 약간' 늦게 고든이 도착함으로 인해 사망한다. 그리고 하비는 참으로 알 수 없게도, '정확하게' 얼굴 반쪽에 큰 화상을 입고 진정한 의미의 '투 페이스'가 돼버리고 만다. 폐공장에 묶여있던 하비는 레이첼과 미리 설치된 전화를 통해 대화하던 중 갑자기 드럼통 하나를 쓰러뜨리고, 휘발유를 바닥에 흐르게 하면서 그 위로 얼굴 반쪽을 포개며 넘어진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고 지나가면 그뿐일 테지만, 영화를 두 번 감상하면서도 나는 그가 왜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인지 이유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 눈에 그건 거의 '어떻게 해서든 투 페이스가 되기 위한 발악'처럼 보인다. 그런데 배트맨의 우둔함이나 조커의 전능함을 문제 삼는 이는 있을지언정, 정작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품는 리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하비 덴트는 의자 위에 꽁꽁 묶인 상황에서 무엇을 위해 기꺼이 휘발유를 쏟고 그 위로 넘어진 것일까? 가장 유효한 가설은 하비가 '어떻게든' 자신에게 묶인 줄을 풀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실패했고, 그로 인해 휘발유를 쏟으며 넘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구한다는 것이 레이첼의 구출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비는 배트맨이 그에게로 오자 배트맨에게 원망하듯 소리를 지른다. '한 쪽만 살게 될 것'이라는 레이첼의 말에 하비는 레이첼을 안심시키려고 '그들은 너를 구하러 갈 거야'하며 안심시키지만 사실 배트맨이라면 자신에게로 오리라는 것을 아는 쪽은 레이첼이다. 위로를 해야 하는 쪽은 레이첼이지만 그녀는 대신 하비에게 그의 청혼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어느 쪽이 구출되든 한 명이 죽어야만 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결혼이기에 그녀의 대답은 곧 유언이거나 죽을 자를 위한 위로의 말이 된다. 그녀의 의중은 어디에 있었을까? 만약 하비가 죽고 그녀가 살아난다면 그녀는 마침내 브루스와 함께 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편지는 이미 알프레드에게 전해진 상태다.
그 사이에 조커는 탈출을 감행한다. 마로니와 갱들이 복부 내에 미리 폭탄을 심어둔 자를 투입시키면서 가능한 일이다. 물론 조커가 폭탄을 작동시키는 법-전화번호를 미리 알고 있다는 점에서 잡히고 탈출하는 것 역시 그의 계획의 일부다. 계획의 일부?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어놓자. 어쨌든 하비 덴트는 심각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가고 브루스는 레이첼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육신의 피로로 잠시 쉬고 있는 사이, 브루스가 배트맨이란 것을 알게 된 웨인 기업의 회계사는 방송에 나와 배트맨의 정체를 폭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난데 없이 탈출한 조커가 방송에 전화를 해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지 않기를 바라고, 회계사가 죽지 않으면 고담 시의 병원을 폭파시키겠다는 새로운 협박을 한다.
시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고, 조커는 교각이나 어떤 건물 내라도 안전할 수 없다는 협박을 하면서 도시를 더욱 혼란으로 몰고 간다. 고담 병원에 가족들이 입원하고 있는 시민들은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하고, 회계사를 죽이려는 시도도 서슴치 않는다. 자신들의 가족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것보다는 한 명의 타인을 죽이겠다는 이 인지상정(?) 덕분에 '선량해보이는 사람도 약간의 계기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범죄자로 변한다'는 조커의 말이 증명되는 것이다. 조커는 늘 양자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 어느 쪽도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없다. 조커가 무서운 것은 어쩌면 현실의 선택이라는 것들이 결국 그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커는 늘 선택을 강요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최선의 결과는 아니라는 현실을 드러내며 원칙과 계획을 내세우는 자들에게 원칙과 계획이란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은 조커 뿐이다.
하비는 조커를 놓아준다. 바로 그가 믿는 '공평함'의 원리에 의해서. '투 페이스' 하면 '동전 던지기'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영화의 중반부가 지나서야 우린 알게 되지만, 하비의 동전에는 뒷면이 없다. '운은 스스로 만드는 거야'하고 말했던 하비의 의도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레이첼의 죽음으로 인해 이면이 없던 하비 덴트에게 양면성이 생겨버린다. 결국 조커가 투 페이스를 만든 셈이다. 그런데 왜? 조커는 배트맨의 이중성을 없애기 위해 이 게임을 시작했고, 하비 덴트는 처음부터 그의 게임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레이첼의 죽음 이후로 그는 배트맨의 정체를 알려고 하지 않는 대신, 하비에게 양면성을 만들고자 한다.
하비는 동전을 던져서 복수/심판의 여부를 결정하기 시작한다. 그의 동전엔 양면이 없었기 때문에 이전까지 그가 동전을 던져 결정했던 일들은 모두 그의 원칙 아래에 결과가 명백한 결정들이었다. 그런 하비에게 조커는 '너희가 계획했기 때문에 일이 자꾸 틀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하비의 모든 선택은 결과가 불확실한, 반반의 확률은 가진 선택이 된다. 모든 일은 앞면이라는 긍정적인 그의 원칙에 어두운 그림자가 진 것이다.
레이첼의 죽음 이후 하강 곡선을 그리리라고 생각했던 영화는 다시 한 번 상승곡선을 탄다. 이것만으로도 <다크나이트>는 충분히 이상한 영화다. 영화 전체를 통해 상승곡선을 타면서 갈등을 정점으로 끌어올려 터트린 후 하강하면서 끝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 시나리오의 형태지만, <다크나이트>는 거의 모든 시퀀스에 걸쳐 상승과 하강이 있다. 더 무서운 점은, 하나의 하강이 끝났을 때 갈등이 해소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한 자리가 새로운 상승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마치 한 악장이 끝났을 때마다 한 옥타브가 계속해서 올라가는 악보와도 같다. 어떤 의미론 <다크나이트>야말로 진정한 '롤러코스터' 영화라 할 수 있겠다.
폭발한 병원에서 호송된 사람들과, 경찰청에서 이송된 범죄자들은 각가 다른 선박에 탑승하지만 곧 두 선박은 모두 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고, 그들은 또다시 선택을 강요당한다. 각각의 배에 설치된 폭탄의 기폭장치는 서로의 손에 쥐어지고, 자정이 지나기 전에 한쪽을 폭파시키지 않으면 양쪽 모두가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조커의 협박에 양쪽의 탑승자 모두 심각한 갈등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다시 상승곡선을 그린다. 동시에 투 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의 복수와 심판의 행로가 이어지고, 다시 조커를 추적해야 하는 배트맨의 이야기까지 영화는 신기라도 들린 듯한 교차편집을 통해 세 방향의 이야기를 숨막히게 그려간다.
레이첼의 죽음과 하비의 부상은 그 겉모습이야 어떻든 브루스 웨인에겐 개인적인 손실로 다가온다. 범죄가 단순히 범죄의 영역을 넘어서 개인적인 싸움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선을 넘었어요' 브루스가 말하자 오히려 알프레드는 '아니오, 선을 먼저 넘은 것은 주인님'이라고 대꾸한다. 애시당초 범죄 소탕을 빌미로 사적인 싸움을 벌여왔던 것은 배트맨이다. 그가 팔코니를 잡았지만 팔코니의 조직은 말로니를 앞세워 여전히 기세등등하고, 듀커드의 손에서 고담 시를 구했지만 여전히 도시는 범죄 천국이다.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라는 기업가의 위치를 이용해 최첨단 지폐를 통해 범죄자를 추적했고, 그것은 범죄자들로 하여금 홍콩의 기업가 라우를 끌어들이게 만들고, 조커를 끌어들이게 만들었다. 배트맨이 '강하게 나오면 나올 수록, 그들의 저항도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게도 범죄를 소탕하기 위한 배트맨의 노력은 결국 고담 시에 점점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 것이다. 범죄자들이 거세게 나올수록 배트맨이 강하게 대응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범과 공권력이 하지 못하는 일들은 해내지만, 법 아래에서 그 역시 무법자이긴 마찬가지다. 하비를 이송하던 경찰 호송차를 조커가 추격할 때에 배트맨의 활약을 돌이켜보자. 텀블러를 타고 그들 뒤를 쫓던 배트맨은 텀블러가 망가진 후 배트 포드를 분리해내 질주한다. 하비 덴트를 구하고 조커를 잡기 위한 명목 아래 그는 주차되어있던 차들을 날려버리고, 전철역 안으로 뛰어들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무법자를 잡기 위한 무법자. 어떤 식으로든 시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배트맨과 범죄자들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배트맨 비긴즈>에서 라스 알 굴/듀커드는 '사회의 관용이 악을 키운다'고 했다. 이 말을 다르게 대입한다면 고담 시에서는 '배트맨의 활약이 악을 키운' 셈이다. 브루스는 시민들이 '배트맨의 메시지를 오해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배트맨'의 역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브루스 혹 그 자신이 아닐까?
배트맨은 대의를 위해 사회적 질서를 무시한다. 그러나 범죄소탕을 위한 원칙을 내세우는 그가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고담 시에 질서를 세운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배트맨은 가까스로 조커를 붙잡지만, 그가 조커를 붙잡는 목적이었던 하비 덴트는 거기에 없다. 조커는 시민들과 범죄자가 서로의 배를 폭파시키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려 하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망설였던 시간이 배 안의 사람들 서로에게 죄책감과 신뢰가 뒤섞인 감정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조커는 자신의 게임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실패한 셈이지만 그것은 고작 그가 만들어낸 거대한 게임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배트맨이 조커를 잡는 동안, 조커가 벌여놓은 또 다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투 페이스라는 이름의.
투 페이스는 고든의 가족을 납치해 자신의 원칙을 증명하려 한다.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는 긍적주의적인 그의 신념은 레이첼을 잃음으로써 의미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자신의 가족이 되었어야 할 레이첼을 잃었다는 이유로 고든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으려 한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주장하는 공평한 댓가의 대상이 고든이 되어야 하는가? 하비는 고든에게 경찰 내부에 있는 자들부터 솎아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그때마다 고든은 우유부단하게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레이첼과 하비 자신을 납치한 자들은 전부 고든의 밑에 있던 경관들이었고, 그 때문에 투 페이스가 된 하비는 고든의 탓으로 모든 것을 돌린다.
이런 하비의 모습은 어쩐지 부모의 죽음을 팔코니의 탓으로 돌렸던<배트맨 비긴즈>의 브루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영화는 내내 하비 덴트의 모습을 배트맨의 대칭이자 브루스의 이면으로서 그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했던 조커나 마로니가 아닌 고든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겪게 하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하비/투 페이스는 고든에게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다 소용 없다'고 말한다. 레이첼을 잃은 것은 하비 뿐만이 아니다. 레이첼을 잃은 충격이 더 큰 쪽은 오히려 브루스/배트맨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레이첼이 없어서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되는 쪽은 하비가 아니라 브루스다. 그런데 하비/투 페이스는 오히려 브루스가 내야 할 화를 대신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엉뚱한 대상에게 내고 있다.
어쩌면 하비는 조커에게 원망을 돌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조커는 배트맨과의 대결에서 수 차례 보여주었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인 조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조커가 아니라면 하비가 원망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아마도 배트맨일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이 배트맨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배트맨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고 자수했다면 레이첼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방향으로만 서사가 진행되는 영화를 보며 관객인 우리가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지만 배트맨이 나서기 전에 하비 스스로 배트맨임을 자처하고 체포되었기에 모든 것을 배트맨에게 돌리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아마도 하비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투 페이스가 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비가 투 페이스가 된 목적이 심판이라는 이름의 복수를 행함으로써 죄책감을 없애는 행보를 걷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브루스가 배트맨이 된 동기와 결국 일치하게 된다. 배트맨이 자경단들에게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심판자가 될 '권리'라는 것이 하비에게 생기게 된 것이나 다름 없기 떄문이다.
그러나 브루스는 결코 하비가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길 원치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자신의 타락과 폐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하비가 변질된 것은 브루스/배트맨의 탓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레이첼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하비의 자수를 만류하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범죄자를 직접 처단하진 않겠다'는 자신의 원칙을 어기고 조커를 죽였더라면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조커는 배트맨에게 '두 사람을 구하려면 오늘 네 원칙을 하나 깨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어기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구하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범죄자들을 직접 처단하지 않는다는 원칙.
<배트맨 비긴즈>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어째서 브루스 웨인은 범죄자들을 직접 처단해야 한다는 라스 알 굴/듀커드의 뜻에 반발한 것일까? 그는 듀커드에게 자신이 직접 선악을 심판한다면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살인만이 범죄는 아니다. 그는 이미 기물 파손과 교통법 위반, 사유재산 파손은 물론 인권침해까지도 서슴치 않으며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있다. 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범죄자들의 대응 역시 상상을 초월하도록 강력해지고 있다. 이것은 흡사, 만화 <드래곤 볼>에서나 보았을 법한 강자의 규칙인 것이다. 내가 강해질수록 상대도 그만큼 강력해지는 것. 앞으로 더욱 강력한 범죄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면, 배트맨 역시 더욱 강력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강력해지는 만큼 앞으로 더욱 많은 법들을 어기게 될 것 역시 자명하다.
배트맨은 조커와 대면하여 그를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원칙 때문에 그를 살려두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지킨 덕분에 결과적으로 모든 일들은 더욱 악화된다.
하비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비와 레이첼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브루스는 브루스 웨인으로서도, 배트맨으로서도 모두 실패한 꼴이 되었다. 그리고 배트맨은 고든에게 하비가 죽인 사람들과 하비의 죽음을 자신이 저지른 것으로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영웅이 되어서 일찍 죽든가, 아니면 악당으로 오래 살아남는 것'. 하비의 말처럼 배트맨은 배트맨으로 남아있기 위해 기꺼이 악당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고담 시에 필요한 것은 하비 덴트와 같은 깨끗한 영웅이지, 자신처럼 정체를 감추고 암약하는 자여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고든은 하비의 시체를 보며 '결국 조커가 승리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과연 '어디까지가' 조커의 의중이었는지가 궁금해지는 동시에, 애시당초 조커가 벌여놓은 이 게임에서 배트맨이 승리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몇 가지나 되는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체를 밝히고 자수하는 것? 레이첼을 구하고 하비 덴트를 잃는 것? 조커를 죽이는 것? 어떤 경우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조커가 '바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애시당초 그에겐 최종 목적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신의 말처럼 현재의 조건에 따라 '미친 개'처럼 그저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앞서도 말했듯 조커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단순히 물리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늘어놓는 말들은 마치 브루스 웨인과 하비 덴트, 양 극단에 서있는 두 사람에게 경고하는 메시지와도 같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경고? 극단에 치우치는 것에 대한 경고. 말하자면 조커는 미친 놈이며 살인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용 주의자인 것이다(최후까지 양면성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은 조커 뿐이다). 범죄를 극단적인 방법으로 제압하는 배트맨, 그의 존재는 곧 조커라는 유령을 불러들였으며,깨끗했던 하비 덴트를 극단적 성향의 심판자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조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메시지다. 배트맨이라는 극단적 영웅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과 같은 초월적 범죄자도 계속해서 등장하리라는 끔찍한 경고다. 그리고 그것은 곧 배트맨이라는 존재 자체가 실패라는 뜻이기도 하다.
조커는 트럼프에서 가장 강력한 기능을 하는 카드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패가 되지 못한다. 다른 카드와 함께 할 때, 조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배트맨이라는 강력한 카드가 있기 때문에 조커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경찰들에게 쫓기는 배트맨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영화는 끝났을지언정, <다크나이트>가 던지는 질문들은 하나도 대답되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나이트> 이후의 이야기를 계획해놓았다면 언젠가는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궁금증. 과연 <다크나이트>라는 제목은 배트맨만을 지칭하는 것인가? 진정한 의미의 '다크나이트'는 과연 누구인가? 배트맨을 중심으로 놓고 하비 덴트가 투 페이스가 됨으로써 그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라면, 그리고 조커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 패는 '트리플'이 되는 것일까? 셋은 결국 하나나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두 장의 카드는 사라지고 배트맨은 결국 다시 배트맨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 자체가 달라졌다. 경찰에 쫓기면서 범죄자들을 쫓아야만 하는 배트맨. <배트맨>시리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손에 의해 더는 히어로 물도 아닌 제삼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배트맨 영화는 이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브루스 웨인/배트맨의 존재 목적과 나아갈 방향은 <다크나이트>를 통해 더욱 모호하고, 불안해지고 있다.
다음 <배트맨> 영화에 나올 악당으로 벌써부터 '리들러'가 언급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악당이 나오든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을 맡는다면 환영일 것이지만,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이야말로 관객에게 끝없는 수수께끼를 던져 그 본의를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진정한 리들러가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에 잠시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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